사랑에 눈을 뜨라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끝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면서 살아간다. ‘나’ 의 모든 존재는 나를 위해 천지 만물을 조성하신 그분의 사랑에 예속된다.(오 인숙의 크리스천 청년에게 주는 50훈에서)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창조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해서 이해 할 수가 없다. 엄마의 젖을 물고있는 어린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지만 엄마의 따뜻한 품속을 알고 그 품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편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단 한가지 이유는 단지 아기가 엄마를 아는 것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엄마에 대한 아이의 신뢰 관계때문에 아이는 평안을 느끼고 있는 것 이다.
온몸이 뒤틀린 가운데서도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송명희 시인의 맑고도 청명한 영혼이 그리운 것은 온갖 더러움에 찌든 나의 영혼이 쉴 곳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과 관계 된 모든 사람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의 영혼은 과연 누구를 신뢰 할 수 없어서 인가?
이것은 깊은 좌절이 아닐 수 없다. 깊은 좌절에서 오는 분노는 때로는 이유 없이 짜증이 나는 것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털어 놓음으로서 상대방에게까지도 심한 감정이 상하게 되는 일들이 생겨나게도 한다. 이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대한 깊은 절망 감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까지도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노를 분노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방법은 없는가?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가인의 분노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나의 분노는 과연 누구를 향한 분노이며 정녕 이유 있는 반항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나는 누구인가? 분명 본질적인 물음이지만 그 해답은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그분만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시리라. 그러면서도 내 자신마저도 알 수 없는 이유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 아닌지, 혹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 한 것이 아닌가?
사연이 많고 말이 많은 세상 속에서도 말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형체가 없는 바닥과 끝이 없는 것이라면 좋은 것은, 우리의 입가에서 맴도는 그것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정령 값어치 있는 것들 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가?
리힐리즘 처럼 보여지는 병든 세상에서도 사랑은 존재하는가? 우리가 바르다고 판단하는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파야 하고 우리가 최종적으로 서야만 하는 곳은?
침묵을 해야만 하는 그리고 깨어야만 하는 것은 누구 때문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해서 이다. 사랑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은 살아야 만 하기 때문이다.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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