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과 색안경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맡았던 역은 배가 고팠던 사자 역이었다. 시나리오 대본도 성경 속에 있는 사자 굴속의 다니엘이라는 내용으로 직접 각색해서 만들었던 내용이라서 직접 연출까지, 소품, 디자인까지 맡았었는데 중요한 것은 성대 묘사할 사람이 없어서 사자의 울부짖는 모습까지 함께 맡아야 했었다. 사자 가면을 쓰고 털을 뒤집어쓰고 으르렁거리다가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별이 달린 봉으로 머리를 치자 갑자기 순한 모습으로 변하는 역이었는데 그때 많은 관객들에 의해 그 공연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었다.
얼마 전 TV 광고 중에 무뉘 만 나무 아니 예요 라는 광고 문고가 지금도 유행어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일을 자기의 열정을 가지고서 최선을 다해서 한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무엇을 하는 척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에 모든 이들을 속이기 위한 몸짓에 불과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정이 없는 우리의 신앙도 바로 무뉘 뿐인 생명력이 없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자신을 보면서 무뉘 만 그리스인이 아니 예요 라고 누군가 묻게 된다면 나는 제일 먼저 숨은 곳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가면과 색안경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색안경은 여름철에 더위를 식혀준다는 시각적 느낌이나 멋의 상징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심리학적인 내용으로 보면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가면과 같은 역할을 한다. 흔히 틀에 박힌 생각을 쉽게 깨지 못하는 사고를 가리켜 고정 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고 말하는 것을 색안경을 끼고 본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억지로 닫고 자기의 모습을 철저하게 가린 채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에게도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몸짓인가?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 부모. 형제를 비롯하여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가? 이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삶에 대한 반역이고 비겁한 행동이다. 타인이 자기에게 보인 반역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너그럽고 관대하다면 이것 또한 너무 이기적이기도 하고 비열한 행동이다. 즉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이중적인 모습으로 연출한다는 것은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예전에 나는 기도하면서 가슴에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소원했던 적이 있다. 안타까움과 절망에 담긴 몸짓으로 주저앉아 탄식하며 울기도 한다. 내가 여인이 아니듯 배 아파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의 진통을 느끼며 기도하길 원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내가 해산의 고통을 다하기까지 그 수고를 아끼지 않기 원하노라” 어느 해인가 손 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관에서 전시되어 있는 그림 중에서 그 그림에 대한 설명과 함께 쓰여진 이 성경 구절은 여러 해가 지나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육신이 곤하여 쉽게 낙심하며 넘어지고 이젠 예전에의 첫 사랑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져 점점 더 무기력한 나를 볼 수밖에 없으니...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현재의 나는 꼭 이런 가면 속에 숨겨진 나를 끊임없이 연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몹시 나는 괴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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