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영광 비잔틴 제국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새벽 미명이 다가와 날이 밝아 옴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밤이 깊고 어둠이 길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둠은 지나고 곧 광명한 날이 밝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에서의 말씀에서도 모든 것이 때와 기안이 있으며 어두움이 있으면 곧 밝은 날이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곧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세상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밤과 밝은 날이 연속적으로 이루지는 것을 통하여 남긴 기록은 후대의 사람들은 하나의 역사라는 잣대로 평가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진 역사가 중요한 것은 곧 그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마치 큰물을 이루어 강을 만들고 거대하고 높은 파도를 만드는 드넓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소용돌이 치고 굽이치는 강과 바다도 깊은 산속의 작은 골짜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한줄기 작은 수원의 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기독교의 역사는 어두움이 깊은 흑암의 역사 속에서도 그 뿌리가 뽑히지 않으며 마치 그루터기의 나무처럼 싹 티울 뿐만 아니라 꽃을 피웠고 아름다운 결실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3편의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대한 시청 소감은 내게 있어서 기독교의 역사관으로 본다면 기독교에 있어서 암흑의 시대이었음을 평가 합니다.
평화롭고 밝은 에덴에서 조차 사탄은 그 밝고 평화로움을 질투하여 우리의 조상인 아담을 무너트렸듯이 언제나 밝은 빛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어둠이라는 존재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음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적인 트랜드를 보아도 사탄이 조장하고 있는 문화는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더욱 아름답고 화려해 보입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기독교를 공인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또한 기독교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오직 자신의 정치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점과 권력을 위해 무고히 아들과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잔혹성으로 그의 행실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는 점 등에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존재합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사상적 기조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로마 문화의 계승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일어난 많은 문화 양식 특히 건축 양식만 보더라도 기독교문화를 나타내기보다도 모든 표현 양식과 상징적인 의미는 로마 카톨릭의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중세 시대를 대표하는 비잔틴 문화를 간략히 소개 한다면 이 시대를 대변하는 많은 철학 사상들이 있었고 그들의 사상에서 주장하는 다양한 주장을 바탕으로 확립된 교리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이어가며, 아랍-이슬람 세력, 투르크족 등 다양한 이민족으로부터 서방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키는 장벽의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원래 2세기경까지는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고 이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심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로마제국의 힘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삼으셨음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3세기 이후부터 세력이 점차 약화 되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동, 서로 갈라졌으며 서로마 제국은 조용히 역사의 소용돌이에 가라앉으며 동로마 제국은 점점 더 강성해 지며 스스로를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며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가듯이 오늘 날의 건축 양식으로는 흉내 내기 조차 힘든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많이 만들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즉 비잔틴 문화의 시작은 로마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특히 서로마제국이 붕괴된 뒤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다른 동방정교회들을 관장하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단논쟁, 아이코노클래즘 등 시행착오를 반복한 뒤 파라마스(14세기) 정적주의(靜寂主義)에서 신비적인 정교신학(正敎神學)이 완성되었습니다.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한때는 비잔티움 제국이 항상 이민족이나 타종교에 적대적이지는 않았고 대립과 반복 속에서도 적당한 타협과 수용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오늘 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 가운데의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관문의 역할도 했으며, 영토를 확장하며 정복지의 전통과 관습을 받아들여 융화하는 등 동서양의 교두보 역할을 했었다고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지였던 비잔티움 제국에서 종교는 정치, 행정, 법률 등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황제의 권위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고, 자연히 중앙집권적 통치가 가능했었습니다. 또한 광대한 영토에 대한 효율적 통치를 위해 법률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에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있었는데 그에 의해서 많은 법률이 여러 형태로 제정 되었는데 그는 법률위원회를 임명하여 제국에서 시행되는 모든 법령에서 모순되거나 반복되는 내용을 정리했으며, 529년 2월에 유스티아누스 법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법전의 사본은 제국 전역과 모든 속국에 배포 되었습니다. 두 번째 법률 개혁은 그리스·로마의 법률 고전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유스티아누스는 534년 다시 법률의 개정판을 공표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도입하고 있는 법체계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는 특히 건축과 회화면에서 눈부시게 발전했으며, 대부분이 종교적 표현에 치중되어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건축 양식은 정복 전쟁을 통하여 점령지로 전파되었으며, 그 예술적 사조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비잔티움 건축과 회화 양식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정교회의 건축과 회화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찬란하고도 광대했던 비잔틴 문화의 이면에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인 부분들을 들여다본다면 내면적으로 보여 지는 것은 모든 제국의 건축 양식에서 표현하는 것은 이 땅위에 신의 왕국을 건설하자는데 목적이 있는데 결국 신의 왕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 들의 왕국을 세우고 자신들만의 영광을 천년만년 누리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문화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사라져 갈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쌓아 올려 진 바벨탑은 높으신 하나님의 권위에 닿아지게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역사의 모든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고백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 말씀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세상이 비록 흑암의 깊은 어두움에 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이 땅을 정리하시고 자신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의 그 넓으신 가슴으로 품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