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개념없음에 대한 단상

잉글랜드 김 2014. 6. 8. 20:25

개념 없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글


개념이 없다는 말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개념이 없다는 의미 속에는 보통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거나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념이 없는 사람이 주위에 있을 경우에 있어서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줄 우려가 있다. 그가 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인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한 진흙창이 될 것이며, 마치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죽을힘을 다해서 허우적거림의 삶을 살 것이며 아울러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그의 곁에서 그와 못지않게 힘들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교회가 비난받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의식이 있는 크리스천들 일수록 가슴 아픈 고통과 그 고통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하나님의 의로 교회가 바로 서도록 눈물 뿌려 기도해야할 것이다. 개념이 없는 이란 글을 쓰신 김 남준 목사님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욕을 먹게 된 것은 삶에 공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셨다. 그는 또한 우리는 삶의 태도를 올바르게 해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워지고, 사람들에게 더욱 존귀하게 여김 받아야 합니다.”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도, 그가 하늘 가치를 따라 살기 때문에 찾아오기보다는 지속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성도가 받은 거룩한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은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지만, 어떤 부분은 뼈를 깎는 아픔이 동반돼야 개선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태도는 타고나는 것도 아니지만, 열심을 내어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기는 그릇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덕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인한 평정한 마음의 상태가 밖으로까지 흘러나와야 사람과도 진정한 화목을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맨붕과 개념없음의 의미:

 

이글은 인터넷에 올라온 누군가의 글이었지만 나름 데로 동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서 참고해 보았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맨붕"이라느니 "개념이 없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뇌의 기능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뇌에 세상을 이해하는 인지지도인 네비게이션을 만들어서 살고 있다. 이 네비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전제로 적절한 행동을 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느끼던 못느끼던 자신의 네비가 시키는 그대로 운전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간혹 네비게이션보다는 불편한 지도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네비게이션을 선호하는 이유는 네비게이션의 활용도면에 있어서 거의 정확하게 길을 알려주므로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을 쉽고 편하게 찾아갈 수 있다는 것과 처음 찾아 가는 길이라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운전에 필요한 필수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길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자신의 네비를 이 변화에 맞추어 신속하게 업데이트를 못할 경우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충돌하는 방식으로 운전을 하게 마련인데 이때 사람들은 이 장본인을 운전에 전혀 "개념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다.

주변사람으로부터 개념이 없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듣고 있음에도 자신의 네비를 계속 업데이트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에게 개념없는 사람을 넘어서서 결과적으로 "맨붕"을 체험하게 하는 장본인이 될 것이다.

맨붕이란 자신의 네비가 어떤 상황에서 현실감각을 잃고 전혀 작동되지 않는 경험을 말한다. 아프리카의 오지마을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을 어느 날 뉴욕 맨하턴 한 복판에 떨어트려 놓았다고 가정을 해보자. 이 사람의 네비는 전혀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뉴욕에서 체험하는 모든 사건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상태가 맨붕의 상태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이와 같은 맨붕상태를 경험한다. 맨붕은 자신의 네비가 현실감이 떨어져서 경험할 수도 있고 현실감이 전혀 없는 네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경험할 수 있다.

결국 개념없음과 맨붕은 뇌를 훈련시키지 않은 정신적 문제의 단기적, 장기적 결과이다. 가끔 네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상황이 개념없음이고 장기적으로는 네비가 붕괴되는 상황은 맨붕으로 이끌 것이다.

세상은 급속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네비는 시간이 지나면 다 현실감과 유용성이 떨어져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개념이 없음과 맨붕을 선사하게 될 운명에 처해 있다.

자신의 네비를 자주자주 업데이트 하지 않는 것이 개념없음과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맨붕의 원인이다. 농담으로라도 가끔 개념없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맨붕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면 지금 즉시 네비를 업데이트할 시간라는 시그널이다.

10년 후에도 쓸 수 있도록 네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서 자신을 구해내는 과정을 Deep change라고 부른다.

 

개념이 대중문화에 침투했을 때

천편일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절대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드라마를 보고 똑같은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똑같이 웃는다. 우리나라엔 수 많은 중산층 가정이 있겠지만 드라마에선 고급 가죽 쇼파를 가진 5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영화에 나오는 자폐환자는 모두 서번트 증후군이고 지체 장애를 가진 아버지는 모두 아이엠 샘이다. 아침 드라마는 불륜에 불륜에 불륜을 거듭하고 저녁 드라마는 숨겨놨던 재벌의 아들 딸로 흘러 넘친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개념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대량생산된 개념들은 자본의 힘을 뒤에 엎고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사람들은 천편일률에 치를 떨면서도 열심히 그것을 소비한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화 산업의 핵심 전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전략은 똥을 만든 뒤 그것을 맛있는 음식이라고 속여 파는게 아니다. 그들의 전략은,

우리를 똥개로 만드는 것이다.

개념이 인간관계에 침투했을 때

 

존재는 결코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얼마나 자주 '한 마디'로 정리하길 강요 받는가?

당신은 1년에 열 번쯤은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리고 두 번쯤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덤벙이지만 친구의 생일을 매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주는 섬세한 사람이다. 그러나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는 덤벙이일 뿐이다. '덤벙이'라는 개념은 당신의 다양성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다.

객체의 개념화는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수 과정이다.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념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정리가 되고 뇌에서 그것을 지식으로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대인 관계에서 오는 우울증이 개념화된 나와 내가 알고있는 나 사이의 괴리로 인해 생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도대체 나 다운건 뭐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좀 더 농밀하고 다양하며 모순적인 존재다. 하지만 타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고정되고 예측 가능한 기계다. 타인의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쟤 왜 저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가진 본연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인, 또는 특정 집단이 정의내린 개념으로서 행동하는 때가 생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정신분열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예측 가능한대로 타인이 움직여줄 때, 우리는 그것을 안전한 관계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정반대다.

'쟤한테 저런 면도 있었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 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해의 핵심은 의외성을 최대한 많이 발견하는 것이다. 의외성이란 결국 개념을 뚫고 나오는 존재의 다양성이다. 그 다양성을 모두 수집하고 채워 넣을 때 타인은 진짜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