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뉴에이지에 있어서의 윤리 문제
1. 뉴에이지의 인간
뉴에이지의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다. 신이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신의 일부인 것도 아니고 신 자신이다. 이것은 인간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뉴에이지에서는 낙관론적인 진화론을 따른다. 창조는 진화의 과정이며 죄는 진화과정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의 개념도 이런 진화과정의 일부로 이해하며 모든 인류사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이 선취될 정점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에 비로서 인간은 자신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적 배경에서는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이다 묵상을 통해서 본래적인 선을 찾게 된다고 한다.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근본적으로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악과 선의 개념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구분을 할 수 없고, 오히려 악이라는 것을 죄책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불균형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는데 우선 죄의 문제이다. 인간 내면에 있는 신의식을 깨닫지 못해서 비본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악에 대한 저항 문제인데 모든 것의 포괄하는 하나뿐인 존재인 우주 대영 안에는 어떠한 악도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악일 수 없다. 역사와 사회속의 불의와 부패와 거짓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악한 세계와 질서에 항거함으로서 그러한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더욱 강화해야한다. 이런 선악의 모호함은 윤리적으로 애매함을 낳는다.그리고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구분한다. 육체는 물질적인 요소로 가치 없게 보는 반면 영혼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요소이며 본질이라고 한다. 누우스는 영이며 로고스는 영의 발상이며 육체는 동물이다. 로고스는 영원한 자아이며, 윤회하고 영원히 산다. 이러한 사상에서 악이란 우주적 영과의 불화이며 선은 우주적인 영과의 합일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다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다”(롬3:23)고 가르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으로 죄가 나타나며 사회적, 도덕적 영역은 부정으로 나타난다. 니이버는 인간의 죄가 그의 오만과 가지애에 있다고 하면서, 이 오만은 자신의 제한성, 무력감, 의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려는 데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는 권력, 지적, 도덕적, 영적 오만의 네 형태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선은 오직 은총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바울은 인간에 대하여 삼분법 즉 영, 육, 혼으로 구분하거나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러한 구분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전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결국 뉴에이지의 이원론적 인간 이해는 기독교의 인간 이해와 다르다. 그러나 때로는 기독교인들도 육은 천하고 영만 존귀하다고 여기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육체 없는 영혼이 없고 영혼 없는 육체는 무의미하다. 기독교의 인간은 영과 육을 함께 지닌 전인적인 인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2. 뉴에이지의 제문제
먼저 개인이해로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개인중심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의 삶은 관계적이다. 이웃과의 관계에로 부르셨고, 나아가서 사회적 차원에까지도 협력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적인 이해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인간과 다른 사람을 위한 인간이다.
두번째로 생명문제에서 세속적 인본주의 자들은 낙태와 산아제한 등을 인간의 권리의 하나로 인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다루겠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죽음이 없는 윤회전생을 가르친다. 영혼이 반복되는 것이고 사람에게 영혼만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결국 그들의 죽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신지학에서는 이런 죽음의 한 요소로 자살을 설명하고 있는데 “자살은 가장 나쁜 범죄이고 결과에 있어서 비참하다. 그러나 자살이 이 세상을 그만 두겠다는 소원에서가 아닌 영적 실존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자연적인 욕망이라고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에서는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논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나 사물을 수단이나 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비록 타락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는 새로운 인간으로 보고 결코 이성이나 지능이나 기능의 정도로서 부지 않는다고 맹용길 교수는 이야기하고 있다.
세 번재 성에 대하여 뉴에이저들은 동성애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성교란 인간의 용어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즐길 때 이것은 인(仁)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성서에 기초한 콜브는 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성은 육에 속한다. 하나님은 성을 창조하신 후에 좋다고 하셨다. 이 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둘째로 성은 남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을 서로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 이것은 분리가 아닌 하나이며 그 속에서 완성을 이룬다. 셋째로, 성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수단이다. 성은 공동생활의 원칙이 되는 정의, 평화, 공평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며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면을 보여야한다.
3. 상대적 상황윤리로서의 뉴에이지의 윤리
엄격히 말해서 뉴에이지에서는 윤리가 없다 윤리라는 것은 인간의 삶과 관계되어 지는데 뉴에이지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으므로 윤리가 있을 수 없다. 다만 기독교 윤리학적인 근거에서 그 비판할 주제들을 살펴본다.
첫째로 뉴에이지에 나타난 윤리는 상대주의 윤리이다. 세속적 인본주의와 뉴에이지운동은 모두 자율적이고 상황적인 윤리로 상대적이며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에 기초한 절대윤리이다.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 그들에게 진리란 모든 것이며 거기에는 범시론이 있을 따름이다.
둘째로 뉴에이지의 윤리는 인간중심적인 윤리이다. 인본주의 선언문에서 “지금 여기에서 인간성의 실현이며 완성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곧 신이며, 우리의 목표는 자신이 신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뉴에이지는 가르친다.
셋째로 뉴에이지의 윤리는 상황적 윤리이다. 뉴에이지의 윤리는 원칙이나 규범이 없이 스스로 상황에 따라 생각하는대로 행동하는 상황윤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플레처는 산황윤리를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사이에 둔 윤리로 전개한다. 이것은 신중심의 윤리가 인간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법과 규칙에만 관계하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하는데 대한 대안 내지 해답으로 제창한 윤리이다. 그리고 상황윤리는 사랑의 개념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윤리에도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 상황을 지나치게 많이 강조한다. 둘째, 꼭 필요한 규범마저 상대화 될 수있다. 셋째,사회적, 역사적 차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개인주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뉴에이지 윤리는 상황윤리가 될 수 없고 제멋대로의 윤리이다. 단지 상황적 윤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윤리에 규칙도 가치도 없다는 점과, 지극히 개인적이고 상황적인 판단에 따라 편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상황윤리와 같을 수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 상황윤리와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윤리인 것이다.
1. 뉴에이지의 인간
뉴에이지의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다. 신이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신의 일부인 것도 아니고 신 자신이다. 이것은 인간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뉴에이지에서는 낙관론적인 진화론을 따른다. 창조는 진화의 과정이며 죄는 진화과정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의 개념도 이런 진화과정의 일부로 이해하며 모든 인류사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이 선취될 정점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에 비로서 인간은 자신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적 배경에서는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이다 묵상을 통해서 본래적인 선을 찾게 된다고 한다.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근본적으로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악과 선의 개념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구분을 할 수 없고, 오히려 악이라는 것을 죄책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불균형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는데 우선 죄의 문제이다. 인간 내면에 있는 신의식을 깨닫지 못해서 비본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악에 대한 저항 문제인데 모든 것의 포괄하는 하나뿐인 존재인 우주 대영 안에는 어떠한 악도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악일 수 없다. 역사와 사회속의 불의와 부패와 거짓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악한 세계와 질서에 항거함으로서 그러한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더욱 강화해야한다. 이런 선악의 모호함은 윤리적으로 애매함을 낳는다.그리고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구분한다. 육체는 물질적인 요소로 가치 없게 보는 반면 영혼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요소이며 본질이라고 한다. 누우스는 영이며 로고스는 영의 발상이며 육체는 동물이다. 로고스는 영원한 자아이며, 윤회하고 영원히 산다. 이러한 사상에서 악이란 우주적 영과의 불화이며 선은 우주적인 영과의 합일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다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다”(롬3:23)고 가르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으로 죄가 나타나며 사회적, 도덕적 영역은 부정으로 나타난다. 니이버는 인간의 죄가 그의 오만과 가지애에 있다고 하면서, 이 오만은 자신의 제한성, 무력감, 의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려는 데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는 권력, 지적, 도덕적, 영적 오만의 네 형태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선은 오직 은총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바울은 인간에 대하여 삼분법 즉 영, 육, 혼으로 구분하거나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러한 구분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전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결국 뉴에이지의 이원론적 인간 이해는 기독교의 인간 이해와 다르다. 그러나 때로는 기독교인들도 육은 천하고 영만 존귀하다고 여기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육체 없는 영혼이 없고 영혼 없는 육체는 무의미하다. 기독교의 인간은 영과 육을 함께 지닌 전인적인 인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2. 뉴에이지의 제문제
먼저 개인이해로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개인중심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의 삶은 관계적이다. 이웃과의 관계에로 부르셨고, 나아가서 사회적 차원에까지도 협력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적인 이해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인간과 다른 사람을 위한 인간이다.
두번째로 생명문제에서 세속적 인본주의 자들은 낙태와 산아제한 등을 인간의 권리의 하나로 인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다루겠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죽음이 없는 윤회전생을 가르친다. 영혼이 반복되는 것이고 사람에게 영혼만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결국 그들의 죽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신지학에서는 이런 죽음의 한 요소로 자살을 설명하고 있는데 “자살은 가장 나쁜 범죄이고 결과에 있어서 비참하다. 그러나 자살이 이 세상을 그만 두겠다는 소원에서가 아닌 영적 실존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자연적인 욕망이라고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에서는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논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나 사물을 수단이나 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비록 타락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는 새로운 인간으로 보고 결코 이성이나 지능이나 기능의 정도로서 부지 않는다고 맹용길 교수는 이야기하고 있다.
세 번재 성에 대하여 뉴에이저들은 동성애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성교란 인간의 용어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즐길 때 이것은 인(仁)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성서에 기초한 콜브는 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성은 육에 속한다. 하나님은 성을 창조하신 후에 좋다고 하셨다. 이 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둘째로 성은 남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을 서로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 이것은 분리가 아닌 하나이며 그 속에서 완성을 이룬다. 셋째로, 성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수단이다. 성은 공동생활의 원칙이 되는 정의, 평화, 공평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며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면을 보여야한다.
3. 상대적 상황윤리로서의 뉴에이지의 윤리
엄격히 말해서 뉴에이지에서는 윤리가 없다 윤리라는 것은 인간의 삶과 관계되어 지는데 뉴에이지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으므로 윤리가 있을 수 없다. 다만 기독교 윤리학적인 근거에서 그 비판할 주제들을 살펴본다.
첫째로 뉴에이지에 나타난 윤리는 상대주의 윤리이다. 세속적 인본주의와 뉴에이지운동은 모두 자율적이고 상황적인 윤리로 상대적이며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에 기초한 절대윤리이다.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 그들에게 진리란 모든 것이며 거기에는 범시론이 있을 따름이다.
둘째로 뉴에이지의 윤리는 인간중심적인 윤리이다. 인본주의 선언문에서 “지금 여기에서 인간성의 실현이며 완성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곧 신이며, 우리의 목표는 자신이 신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뉴에이지는 가르친다.
셋째로 뉴에이지의 윤리는 상황적 윤리이다. 뉴에이지의 윤리는 원칙이나 규범이 없이 스스로 상황에 따라 생각하는대로 행동하는 상황윤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플레처는 산황윤리를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사이에 둔 윤리로 전개한다. 이것은 신중심의 윤리가 인간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법과 규칙에만 관계하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하는데 대한 대안 내지 해답으로 제창한 윤리이다. 그리고 상황윤리는 사랑의 개념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윤리에도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 상황을 지나치게 많이 강조한다. 둘째, 꼭 필요한 규범마저 상대화 될 수있다. 셋째,사회적, 역사적 차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개인주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뉴에이지 윤리는 상황윤리가 될 수 없고 제멋대로의 윤리이다. 단지 상황적 윤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윤리에 규칙도 가치도 없다는 점과, 지극히 개인적이고 상황적인 판단에 따라 편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상황윤리와 같을 수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 상황윤리와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윤리인 것이다.
출처 : 두손선교회
글쓴이 : ysong77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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