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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김 2009. 4. 3. 05:36
 

상처입은 한반도적 자아치유를 위한 상담목회(2)

손운산/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목회상담학) 및 교목.

감신대와 연합신학대학원을 나와 예일대학신학부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밴더빌트 대학에서 목회상담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 이 논문은 1996년도 이화여자대학교 교내 연구비 지원에 의한 연구로 완성된 것이다.

IV. 상처입은 자아를 치유하는 방법들

인간은 상처를 받으면서 또 치유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너무 큰 상처를 입은 후에 적절한 치유를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의 자아는 상처입은 순간에 성장이 고정되든지, 아니면 그 순간부터 성장의 방향이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상실과 충격과 분열로 인한 상처는 대인관계, 삶의 의미성 추구 및 신앙생활에 많은 지장을 준다.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면 상처입은 사람은 계속 그 상처의 피해자가 되고, 나아가서 남에게 피해주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상처입은 자아는 새로운 경험 혹은 다른 경험을 통해 치유되고 재구성된다. 자아가 새로워지려면 과거 혹은 현재의 경험과 다른 경험 혹은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 상실과 흔들림과 분열로 상처받은 자아를 치유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여기서는 세 가지의 치유 가능성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첫째는 이야기하기를 통한 치유, 둘째는 애도과정을 통한 치유, 그리고 셋째는 제의를 통한 치유다. 이 세 가지의 치유방법은 상처받은 자아의 치유뿐만 아니라, 상처주는 사회구조까지의 치유와 변화까지 포함한다. 이 방법은 신앙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치유적 전통과 자원을 고려한 방법이다.

1. 이야기하기를 통한 치유

최근에 이야기 혹은 담론에 관한 관심이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이제까지 실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언어가 과연 실재를 얼마나 실재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이제까지 사용되어온 언어가 자아, 세상, 혹은 하나님 등을 제대로 그려왔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실재를 담는 구조로서의 언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른 언어, 예를 들면 이야기, 상징, 은유 등의 언어가 실재를 더 가깝게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상담학이나 정신치유 분야에서도 이야기의 중요성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 교인들의 흩어진 이야기들을 한데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의 중요한 과제다.28) 상담 혹은 정신치유는 하나의 이야기 사건이다. 내담자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표현하며, 상담자는 들음을 통해 내담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내담자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도록 도와준다. 누구한테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의 내적 세계로 초대하는 숭고한 행위다. 이제까지 아무한테도 말해본 적이 없는 사건들, 숨겨온 일들, 부끄러운 부분들이 이야기를 통해 듣는 이에게 보여지며, 말함과 들음의 친교를 통해 말하는 사람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더 깊은 부분까지 표현된다. 듣고 이해하는 사람 앞에서 얽혔던 실타래가 이야기를 통해 풀리기 시작한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야기하면서 그 동안 억압된 사건들이 이야기되길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는지, 잊고 싶었던 사건들이 잊혀지기는커녕 응어리진 채로 남아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얽매여왔던 어떤 사건에서 자유로움을 얻는다. 그 사건이 이야기될 때, 그 잊고 싶었던 사건이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임을 알고 어루만지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이야기하는 자는 이야기의 주인 혹은 저자가 된다. 이야기의 입장에서 치유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 이야기의 저자가 되게 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픔의 사건과 경험은 이야기를 통해 표현되지 않으면 맺히고 뭉쳐진 채로 그대로 남아 계속 괴롭힌다. 예를 들면 분단으로 인한 상처는 크지만 그것은 이야기되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분단시대의 사람들은 분단 이야기의 희생자다. 상처의 치유는 먼저 이야기함으로써 시작된다. 목사인 이씨의 가족은 아버지를 북에 둔 채로 월남했다. 그 가정에는 한 가지 금기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도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떤 모임에서 힘들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 모임 후에 집에 돌아가서 형제들을 모아놓고 처음으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고, 그후부터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으며, 함께 아버지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자기 교회의 교우들 가운데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모두가 울면서 아픈 이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픈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사건에 매이게 된다. 이야기하는 것은 더 이상 그 사건에 매이지 않으며, 대신 그 사건을 현재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 사건이 내 삶을 해석하고 지배함으로 내가 목적어가 되어왔지만, 이야기함으로 이제는 내가 주어가 되고 그 사건의 해석자가 된다. 여기서 그 아픔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의 희생자들은 그 충격을 이야기함으로 서서히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치유가 시작된다.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그 충격으로 인해 일시적 혹은 영구적 심적 마비상태에 빠져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원하지도 않는데 그 사건이 되살아나서 고통을 겪기도 한다. 사건이 고통스럽게 반복적으로 되살아 기억나는 경우나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경우 모두 그 충격을 다스릴 만한 과정을 아직 다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충격적 경험을 대면하고, 재고하고, 통합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피해자의 수동적 입장에서 그 사건을 효과적으로 이야기하는 능동적 입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충격적 사건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그것을 좀더 이해할 수 있고 다룰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29) 이런 과정을 통해 피해자는 이전에 가졌던 세계관과 충격적 사건 이후에 가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를 통합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사건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것은 치유에 아주 중요하고 필요하다.

이야기 과정을 통해 억눌렸던 자아가 되살아나고 이야기를 통해 자아가 새롭게 발달한다. 폴 리꾀르(Paul Ricoeur)의 이야기 이론에 의하면 이야기는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사건적 차원으로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건들이 다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사건들은 기쁨이나 슬픔 혹은 아픔과 같이 감정이 강하게 개입된 것들이다. 둘째는 표현적 차원으로 수많은 사건들을 어떤 틀을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차원이다. 셋째는 이야기를 통하여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는 차원이다.30)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의 아픔을 이야기로 표현할 때 치유가 시작된다. 이야기되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이 이야기되어지지 않기에 계속 앓고 있다. 그러므로 상처를 입힌 사건들이 이야기되지 않고 억압되어 있으면 치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아의 성장과 인간관계에 계속 악영향을 미친다. 리꾀르의 이론을 빌리면 사건이 이야기될 때, 이야기하는 자아가 되살아나서 자아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조씨는 자기가 어렸을 때, 납치되어 고통당하고 수치당했던 아픈 과거를 오십이 넘도록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모임에서 전쟁과 관계된 이야기를 돌아가며 할 때 처음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말하기를 그날 밤에 침대에 누웠을 때, 어릴 적의 그 기억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고 그때의 수치감과 불안감을 다시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게 무릎꿇고 자기의 상처를 싸매달라고 기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자기의 아픈 경험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 됨으로 하나님께도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사건들이 이야기될 때, 그것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자아는 이야기하는 자아가 되고,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자아가 계속 형성된다.

이야기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있다.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함께 그 이야기의 참여자가 되게 한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것은 단지 그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곧 나의 이야기가 됨을 알게 되어 공감하게 된다. 마침내 그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되고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깨달으면서 공동적 이해를 갖게 된다. 이제까지의 아픔의 이야기가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로 들려졌기에 말하는 사람은 이야기하면서 더 많은 수치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상처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때, 치유와 해결을 위해 함께 결단하고 참여하게 된다.

목회상담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나 다른 기독교 이야기들이 제시하는 의미구조와 대면 혹은 대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내담자의 상처입은 자아의 이야기는 기독교 이야기와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이해되고 치유받는다.31)

2. 애도과정을 통한 치유

상처는 적절한 방법을 통하여 돌봄받지 못하면 계속 남아 고통을 준다. 상처입은 자아는 울음 혹은 애도의 과정을 통해 치유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수 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상실을 경험한 가정이나 공동체 혹은 국가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애도의 과정이 없으면 개인의 자아발달이 중단되며, 상실을 경험한 가정은 가족관계에 문제가 생기며 가족의 응집력이 강화되지 않는다. 재난이나 전쟁으로 큰 상실을 경험한 나라가 국가적 애도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발전에 장애가 생기며 여전히 문제되는 구조를 따라가게 된다. 중요한 것을 상실한 경험은 애도의 과정을 통해 치유되면서 자아는 재구성된다. 󰡒상실 없는 사랑은 없다. 또한 어떤 형태든 애도의 경험이 없으면 상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 울 수 없다는 것은 죽음과 재생의 위대한 인생주기를 따라 살 수 없다는 것, 즉 󰡐다시 사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32)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은 끔찍한 사건들을 회상조차 하기 힘들어한다. 그러나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치유의 과정을 밟아간다.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고문도, 기근도, 수치감도 아니었고 울고 싶은데도 울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또 아무도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기를 두려워한다. 비록 수용소에서 나왔지만 그들은 그때 경험의 희생자가 되며, 서서히 그 아픔을 애도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그 여파가 그 자녀들에게까지 미친다.33)

애도는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고치는 필수적 과정이다. 애도가 없으면, 자신의 행동과 반응의 무의식적 동기들이 풀려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일을 신경증적으로 계속 반복하게 된다. 폴락(George H. Pollock)은 애도과정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상실과 변화에 대한 보편적 변화적 적응과정󰡓으로 정의하면서, 애도과정 자체를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으로 본다.34) 애도--해방과정은 삶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누구에게나 생기는 일반적 현상으로 별거, 고독, 후원체제의 상실, 이혼, 실직, 가족의 질병, 수술이나 노화 등의 경우에 온다. 애도는 상실한 대상이 현실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외적 환경에 대한 자아의 적응과정이다.

이산가족들은 거의 모두 애도과정을 가지지 못했다. 제사도 못 지냈다. 같이 살던 가족이 죽을 때 함께 울고, 공개적으로 힘든 것을 이야기하며, 같이 제의에 참여하면 아픔을 그만큼 더 쉽게 극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하면 크게 상처받을 식구를 생각하여 우는 것과 이야기하는 것을 억제하면 그만큼 애도과정이 지연되고, 상처받은 시점에 식구들의 정신활동이 붙잡히게 된다. 이산가족 모두가 애도하지 못한 아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애도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애도할 능력마저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산가족인 동시에 실향민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병도 함께 앓고 있다. 폴락은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이 애도--해방의 과정을 거쳐야 중요하고 필요한 전통들을 간직한 채로 새로운 곳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이 과정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고 문화화 과정을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향수나 동경은 물론이고, 분노, 좌절, 버림받음, 동시에 자기가 버려졌다는 생각 등으로 힘들어진다.35)

중요한 대상을 상실한 사람들은 애도과정을 통하여 상실된 대상과 심리적으로 작별해야 삶이 재구성된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식구들이 그의 심리적 혹은 경제적 역할을 나눠맡아야 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죽음을 인정하기 싫어함으로 가족의 재구성이 어렵게 된다. 그 자리는 여전히 비여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 모든 활동에 지장을 준다. 잃은 가족에 대한 죄의식, 상실로 인한 분노,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의 상실 등으로 타인과의 관계형성이 힘들고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는다. 그들은 충분한 애도과정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 대신 임시적으로 살아가고 밑바닥에는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짙게 깔려 있어, 분노, 한숨, 공허, 디프레션을 겪는다. 프로이트의 이론대로 애도가 없으면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적절한 애도과정을 가지면 상처의 치유와 함께 발전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36)

애도과정을 통해 치유된 자아는 새로운 자아로 슬픔 이전의 상태보다 더 건강한 상태가 될 수 있다. 폴락은 애도과정과 창의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는 성공적 애도과정은 창의적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애도자는 예술, 음악, 조각, 문학, 시, 철학 혹은 과학 등에서 창의적 능력을 발휘하며, 예술 작품의 주제, 스타일, 형식, 내용 등에 애도와 관계된 것들을 반영한다. 애도과정을 잘 마친 사람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또 기쁨, 만족, 성취감 등을 맛보는 그의 능력도 향상된다.37) 애도과정은 비록 지금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물에 대한 아름다운 것들을 회상해낸다. 애도는 또한 현재의 조각난 삶을 통합시키고 새롭게 재구성한다. 이런 과정이 애도자를 창조적으로 만든다.

애도과정은 아픔을 경험한 한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픔당한 공동체에도 필요하다. 미셀리히(Mitscherlich)는 독일 사람들은 패전 후에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본다.38) 그들은 전쟁과 패전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감 혹은 그로 인한 탄식이 없었다. 대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없었던 일로 여겼다. 미셀리히는 과거를 부정하면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거를 강박적으로 반복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나치를 상징하는 물건이나 구호들은 잊혀질 수 있을지 몰라도, 나치의 구조는 사회전반에 걸쳐, 예를 들면, 학교, 태도, 행동이나 사고유형,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남아 반복된다. 일정한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사회가 새롭게 형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존재하는 사회구조를 따라가게 된다. 수백만 명이 죽고 학살당한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학살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유는 사회적 혹은 국가적 애도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 이후 지금까지 국가적 애도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주권을 상실한 채로 거의 모든 것을 상실했던 슬픔과 고통, 동족간의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고, 가족이 이산되는 아픔에 대한 국가적 애도과정이 없었다. 그 결과로 사회의 재구성이 불가능했으며, 잘못된 구조가 반복되어왔으며, 사람들은 그 구조를 추종할 수밖에 없었다. 분단상처는 그 상처를 입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 애도과정을 거쳐야 치유될 수 있다. 상실과 충격과 분열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울 수 있는 장이 공동적으로 마련될 때, 치유는 더 빨라지고 효과적이 된다.

3. 제의를 통한 치유

아픔은 공동체적 제의를 통해 표현되고 치유될 수 있다. 남과 북의 교회들이 민족이 해방되고 분단된 지 50년이 되는 1995년을 희년으로 정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를 벌여왔다. 1995년 2월에 미국 시카고 지역의 한인 교회들이 󰡒희년의 나팔을 크게 불어라󰡓는 주제를 가지고 희년맞이 연합예배를 드렸다. 특기할 만한 순서로는 해방과 분단을 상징하는 50개의 촛불점화, 희년 새해맞이 남북 공동기도문 낭독, 성서의 전통대로 희년을 알리는 나팔인 양각 뿔로 만든 쇼팔 불기, 희년을 상징하는 촛불점화 등이 있었다. 성만찬 시간에는 회중들이 앞으로 나와 성찬을 받고 자리로 돌아갈 때, 집례자들이 󰡒당신은 희년백성입니다󰡓라고 말해주면서 백두산의 나무로 만든 작은 십자가를 목에 걸어주었다. 예배의 참석자들은 모두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남한에서 일본으로 다시 미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도 있다. 이민자들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돌아가지도 못할 고국 혹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힘겹게 살아간다. 다음은 참석자 중의 한 사람의 고백이다.

나는 조국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북한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월남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붙잡혀 여덟 번이나 지긋지긋한 조사를 받았다. 남한에서 교직생활하는 동안에도 많은 제약을 받아 결국 미국으로 이민왔다. 나는 남한이나 북한을 나의 조국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양쪽 모두 나를 버렸다. 그러나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진한 감동을 받았다. 나의 아프고 쓰라린 과거가 뜨겁게 되살아났으며, 처음으로 한반도 그리고 그곳에 태어난 우리를 위해 아픔을 가지고 기도했다. 이 예배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 통일된 나라, 그러면서도 지금과 정말 다른 모습의 조국을 나의 조국으로 그리게 해주었다.

분단은 그에게 상실, 충격, 그리고 분열의 상처를 주었다. 그는 북한에 있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남한도 그를 받아주지 않는 충격에 시달려야 했으며, 남의 나라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채로 살면서 자신의 모습을 설명할 길 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이 예배는 그에게 치유적 전환적 경험이 되었다. 그의 경험을 중심으로 제의가 주는 치유적 효과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39)

첫째로, 제의는 참석자들에게 󰡐우리임󰡑 혹은 󰡐우리됨󰡑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제의는 가족, 교회, 공동체, 혹은 한 민족의 일원으로 그들이 누구이며, 그리고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40) 이런 점에서 제의는 실재를 더 깊게 경험케 해준다. 예배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 실재로서의 분단경험 혹은 분단현실은 참석자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기술해주며, 동시에 자신들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기술해준다. 위의 예배 참석자들은 자기들이 분단의 산물, 분단의 희생자들, 혹은 분단의 상처를 지닌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다시 경험케 해주었으며, 동시에 분단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지닌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둘째로, 제의는 아픔을 공동체적으로 표현함으로 그 자체가 치유적인 동시에 아픔을 산출하는 구조에 대한 저항이 된다. 분단으로 인한 아픔은 공개적으로 아파할 수 없었고, 분단의 구조에 대한 저항은 금지되어 왔다. 그 결과 분단으로 인한 아픔은 그 골이 더 깊어졌으며, 분단의 구조는 한반도를 지배하는 구조가 되었다. 위의 예배에서 아픔이 공개적으로 표현됨으로, 그 아픔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참석자 모두의 것이 되었으며, 나아가서 민족 모두의 아픔으로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아픔을 산출하는 구조에 대한 저항이 되었다. 사사시대의 여성들은 입다의 딸이 아버지의 무모한 서원에 의해 희생제물이 되기 전, 두 달 동안 산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와 함께 울었다. 이후부터 󰡒이스라엘 여자들은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였다.41) 이경숙은 이런 애도의식은 단순한 애도만이 아니라, 소녀 인신 제사제도를 고발하고 여성의 희생을 종결짓게 한 사건이 되었다고 본다. 입다의 딸의 이야기는 󰡒억울하고 슬픈 희생을 기억하고 고발하는 이스라엘 여자들의 연대감󰡓을 강조한 이야기인 동시에, 󰡒이런 여성들의 연대감이 사회를 바꾸고, 제도를 바꾸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다.42) 입다의 딸의 이야기는 제의화된 아픔이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다. 이런 제의화를 통해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그 아픔을 공동체의 아픔으로 재경험하며, 동시에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공동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셋째로, 제의는 새로운 형태의 삶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분단과 통일의 주제는 언제나 다루기 힘들고 복잡한 문제다. 그러나 그런 주제들을 제의적으로 표현했을 때, 참석자들은 다른 경험을 한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 혹은 북한을 지금까지와 다르게 경험했다. 이것은 이편 아니면 저편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를 포용하는 경험이다. 램쇼(Elaine Ramshaw)는 제의가 참석자에게 한편으로 좋은 감정 혹은 긍정적 감정을 강화시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원치 않는 감정을 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줌으로 상반되는 감정을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말한다.43) 예를 들면 장례예배는 참석자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 만남의 은총과 이별의 아픔, 이세상과 저세상 등등의 상반되는 주제들을 동시에 경험케 해준다. 󰡒희년맞이예배󰡓 참석자들은 예배중에는 최소한 분단이 극복되고 남과 북을 하나로 경험하고 나아가서 하나될 나라에 대한 꿈을 가졌다. 제의는 이렇게 현실과 다른 삶 혹은 대안적 삶을 경험케 해주고, 또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해준다. 이것은 예배의 성서적 주제인 희년과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50년이 될 때마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어 가족으로 돌아가고, 팔았던 토지도 도로 자기의 소유가 되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희년의 정신과 제도는 분단과 해방 50년을 맞이한 참석자들에게 자신과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예배는 성서 혹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삶의 형태와 참석자들의 삶의 형태가 만나는 장이 되며, 이 장에서 두 가지 삶의 형태가 대화, 대결, 혹은 융합의 과정을 통하여 제3의 삶의 형태 즉 대안적 삶의 형태를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예배 참석자는 다르게 보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시에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이상의 제의의 치유적 효과는 반 게넵(Arnold van Gennepp)이 말하는 통과의례의 세 단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44) 게넵에 의하면 통과의례에는 분리, 전이, 그리고 재통합이라는 세 단계가 있다. 제의 참석자는 아픔을 주는 현실의 구조에서 분리 혹은 격리된 전이단계에서 제의를 통해 새로운 경험 혹은 다른 가능성을 경험하고 다시 사회로 재통합한다.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분리와 재통합 사이에서 이뤄지는 제의경험을 경계선적(liminal) 경험이라고 부른다. 제의 참석자는 제의를 통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기적 경험을 얻게 된다. 이 경험은 현실세계와 다른 경험으로 신분과 직위가 배제된 평등, 동질성, 자발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45) 경계선적 경험은 현실경험은 아니지만, 참석자들에게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될 뿐만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예배 참석자들은 분단의 현실에서 분리되어 제의를 통해 분단을 뛰어넘어 통일된 나라를 조국으로 볼 수 있는 이상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부르지만이 말하는 예언자적 목회의 역할과 비슷하다. 예언자적 목회는 사람들에게 현실과 다른 대안적 의식과 대안적 공동체를 바라보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재의 사람들에 의해 믿어지고 잉태될 수 있다는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46) 위니컷은 이것을 전환적 경험이라고 부른다.47) 전환적 경험은 환상과 현실 혹은 나와 나 아닌 대상 사이에서 양쪽을 모두 포함하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전환적 대상을 통해 얻어진다. 예를 들면 아기들은 곰 인형이나 부드러운 천 같은 것을 가지고 놀면서 엄마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불안감 없이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경험을 얻게 된다. 예배는 참석자들에게 전환적 경험을 얻게해준다. 현실과 다른 경험, 같은 현실이지만 새롭게 보는 관점의 획득,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달라질 현실에 대한 기대감과 그것을 미리 경험함,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결단 등이 바로 전환적 경험들이다.

IV. 나오는 말

20세기 말에서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교회가 감당할 중요한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치유와 화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20세기가 남겨놓은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해야 된다. 어느 누구도 어느 공동체도 20세기의 아픔, 분단의 상처,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상처들을 치유하지 않은 채로 21세기로 넘어가면, 21세기는 20세기의 모순을 반복하게 된다. 교회는 또한 통일을 내다보며 화해의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서로 적대시하며,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는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전환적 혹은 중간적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가 이야기할 수 있는 마당, 함께 울 수 있는 공간, 공동체적 전환적 제의의 장을 제공할 때, 상처입은 한반도적 자아는 치유되고, 나아가서 치유하는 자아로 발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21세기를 준비하는 교회는 상담목회를 발전시켜야 한다. 상담목회는 상처입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목회다. 설교, 성경공부, 심방, 예배, 행정 등의 모든 목회의 분야가 상처입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제까지의 목회의 주제가 영혼구원이었다면 21세기 목회의 주제는 영혼치유여야 한다. 특별히 한반도에서 상처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상담목회가 21세기 목회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포로시대의 종말을 선언하고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제2 이사야는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로 시작된다.48) 하나님께서 상실과 충격과 분열로 상처입은 한반도의 사람들을 위해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너희는 치유하여라. 한반도에서 상처입은 영혼들을 치유하여라.󰡓

주(註)

27) 에릭슨에 의하면 성인들이 성취해야 될 과제인 생산성(generativity)은 󰡒다음 세대를 형성하고 인도해주는 관심󰡓으로 자손들을 생산하는 종족번식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윤리적 책임적 돌봄이다. Erik H. Erikson, The Childhood and Society, 2nd Ed.(New York: W. W. Norton & Co., 1963), 266-68 참고.

28) Urban T. Holmes III, Ministry and Imagination(New York: Seabury Press, 1976), 186.

29) Ronnie Janof-Bulman, Shattered Assumptions, 109.

30) Paul Ricoeur의 이야기 이론은 University of Chicago Press가 출판한 세 질로 된 그의 책 Time and Narrative, vol. 1(1984), vol. 2(1985), vol. 3(1988)을 참고.

31) 이야기하기의 입장에서 목회상담 이론을 발전시킨 것 중에는 Charles Gerkin, Widening the Horizon: Pastoral Responses to a Fragmented Society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6)와 John Patton, Pastoral Counseling: A Ministry of the Church(Nashville: Abingdon Press, 1983)이 있다.

32) Robert Jay Lifton, 󰡒Preface,󰡓 A. Mitscherlich & M. Mitscherlich, The Inability to Mourn, trans. B. R. Placzek(New York: Grove Press, 1975), vii.

33) 나치 수용소 생존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애도에 관하여는 Yale Danieli, 󰡒Mourning in Survivors and Children of Survivors of the Nazi Holocaust: The Role of Group and Community Modalities,󰡓 The Problem of Loss and Mourning: Psychoanalytic Perspectives(Madison: International University Press Inc., 1989), ed. by David R. Dietrich and Peer C. Shabad, 427-460 참고.

34) George H. Pollock, The Mourning-Liberation Process, Vol. 1(Madison, CT: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Inc., 1989), xiii.

35) 위의 책, 150-51 참고.

36) Sigmund Freud, 󰡒Mourning and Melancholy󰡓 참고

37) George H. Pollock, 󰡒The Mourning Process, the Creative Process, and the Creation,󰡓 The Problem of Loss and Mourning, 28.

38) 이것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A. Mitscherlich & M. Mitscherlich, The Inability to Mourn, trans. B. R. Placzek(New York: Grove Press, 1975) 참고.

39) 제의의 치유적 기능에 대하여는 손운산, 󰡒목회상담의 입장에서 본 제의,󰡓 <신학사상 97호>(1997/여름), 71-89 참고.

40) Kenneth R. Mitchell, 󰡒Ritual in Pastoral Care,󰡓 Primary Pastoral Care, ed. by The Editorial Committee of The Journal of Pastoral Care(Journal of Pastoral Care Publications, Inc., 1990), 54.

41) 사사기 11:40

42) 이경숙, 「구약성서의 여성들」(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72-73.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아픔을 어떻게 제의화했는가에 관하여는 Walter Brueggemann, Old Testament Theology: Essays on Structure, Theme, and Text(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edited by Partick D. Miller, 45-50 참고.

43) Elaine 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Philadelphia: Fortress, 1987), 30-33.

44) A. 반 게넵, 전경수 역, 「통과의례: 태어나면서 죽은 후까지」(서울: 을유문화사, 1985) 참고.

45) 제의에서의 경계선적 경험에 대하여는 Victor Turner, The Ritual Process: Structure and Anti-Structure(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69), 94 이하 참고.

46) Walter Brueggemann, The Prophetic Imagination(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8), 111.

47) 위니컷의 전환적 경험(transitional experiecne)에 대한 것은 그의 The Maturational Processes and the Facilitating Environment: Studies in the Theory of Emotional Development(Madison, CT: International University Press, 1965)와 Playing and Reality(New York: Tavistock Pub., 1971) 참고.

48) 이사야 40:1(표준 새번역).

출처 : 샬롬
글쓴이 : 작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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