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색한 변명, 궁색한 소금 맛
어느 교회를 가보니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묻고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물음이 어쩌면 어떠한 의미도 기대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궁색한 대답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리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왠 쓸데없는 소리”,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교회마다 문은 굳게 잠겨져 있고 어둠이 내린 거리마다 우뚝 솟은 거대한 성벽, 입을 굳게 다문 큰 성문의 얼굴에서 우린 희미한 미소라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날의 교회는 점점 더 건물들을 크게 짓기 위하여 몸 부풀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단지 교회 건물만 커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진정한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날로 비대해지고 물량 화 된, 그러면서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양보와 사랑을 기대할 수조차 없는 신앙은 극도로 불안정한 현실적인 사회의 모순만을 낳고 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교회,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성도,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은 날마다 이 민족을, 이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가고 있지 않은가?
교회가 개혁되지 않고서는 세상도 달라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물고기만이”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법이다. 세상의 구습과 유행을 따라 휩쓸려 가는 교회는 이젠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어찌 부끄러워 아니 해야할 나의 모습이 아닌가?
교회안과 교회 밖, 거울 속의 세상, 거꾸로 보이는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거꾸로 보이는 안경을 쓰면 바로 보이지 않을까? 세계 최대의 교회를 자랑하는 교회와 천만이 넘는 성도를 자랑하고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새벽예배 뿐만 아니라 금요 철야의 열풍, 곳곳에 세워진 전국 각처의 기도원, 한국 교회는 이 민족을 책임질 수 있는가 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이 민족에게 남긴 수많은 업적들이 순교의 피를 흘려가며 지켰던 조국의 교회와 이 민족을 위하여 굳게 세워져야할 교회가 필요악이 라는 돈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교회가 큰 건물을 짓기 앞서 죽어 가는 한 영혼을 생각한다면, 혹은 굶주린 영혼들을 생각한다면 교회가 총 회장 선거에 막대한 비용을 쓰기에 앞서 이 민족을 책임질 인재 양성에 눈을 돌린다면, 그러나 무기력하게 한계에 부딪친 모습이라 할지라도 우린 이 상황을 절망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거울 앞에선 나는 우주 속의 나, 우주 속의 나는, 관계론 적인 속성을 지닌 나로서 존재하고 거울 앞에선 나는 절대적 불변의 너와 나의 관계인 그분 앞의 나를 말하고 싶다. 세상으로 인하여 변질되지 않는 나,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하는 나는 역사와 시대적인 상황에 부름을 입은 나이다.